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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主题汇 | 중국조선족작곡가-동희철

| 主题汇 | 중국조선족작곡가-동희철 长鼓TV
20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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导读:동희철 프로필1929년 5월 21일 (음력 1929년 4월 13일)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동희철 프로필


1929년 5월 21일  (음력 1929년 4월 13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산동 출생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구 정치부문공단 입대, 바리톤, 손풍금 연주원


1947년 길림군구 정치부문공단 제2대대 연주원


1948년 연변문공단 연주원


1950~1956년 선후로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한어사범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 음악교원


1956년 3월부터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 조장, 주임 력임


1965년 길림성민족문공단 창작조 조장


1966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귀환


1989년 정년퇴직


주요사적

《중국음악가사전》, 《중국 당대예술계 명인록》, 《중화 명인세기 사전》, 《세계예술가 명인록》 등에 수록


기타

중국국제방송국 《중국에서 이름있는 조선족 작곡가 동희철과 그의 음악작품》

한국 KBS 방송국 《손풍금 타는 선생님의 음악사랑 45년-중국 동포 작곡가 동희철》(1993년에 소개됨)


연변방송음악사상 살아있는 전설,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 그는 60여년 전 연변자치주 창립 직전부터 음악교원사업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음악인재를 양성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만들어 세인을 감화시킨 존경받는 음악인이다.


영상 - <아, 두만강>을 지휘하는 동희철 

동희철은 1929년 5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산동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고 1934년 가을에 일제놈들의 총칼에 짓밟힌 조국을 떠나 중국 길림성 연변 동불사에 정착하였다.


동희철은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10살이 되도록 학교문앞도 가지 못하다가 동불사소학교 교장선생님 댁에서 삯일을 하면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1944년 간도사도학교 본과에 입학하였을 무렵, 음악박사로 불리는 문하연 선생님이 음악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학교에 단 한대뿐인 피아노열쇠를 쥐여주며 정성껏 가르쳤다. 그 후 그는 학교 취주악대에 입대하여 활약하면서 음악공부에 정진하였다.


18세 나던 해에 길동군구 정치부 문예공작대대에 바리톤 연주자로 입대한 그는 1947년 직접 장춘포위전에 참가하여 총탄이 비발치는 치렬한 전쟁 속에서 함화선전을 벌렸다. 사방에 정적이 깃든 여름밤, 그는 적진지까지 기여가 손에 메가폰을 들고 적군을 향하여 우리군의 포로정책을 선전하고 뒤이어 손풍금을 타고 기타를 치면서 <콜로라도의 달밤>과 같은 세계명곡과 아름다운 소야곡을 연주하였다.


해방군의 포위로 굶을 대로 굶은 데다 장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률 속에 고향생각, 부모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샌 적들은 날이 밝자 흰기를 들고 총을 거꾸로 멘 채 련장의 뒤를 따라 18명이나 투항을 해왔다.


총을 든 적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음악의 위력을 놀랍게 발견한 동희철은 "오로지 음악을 통해야만이 세계의 평화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때로부터 그는 음악이라는 이 특수무기로 인류의 철저한 해방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평생을 이바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47년 장춘해방전역에서 아래와 같은 격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명곡 앞에서는 총을 든 적들도 무력해진다."

"총탄은 사람의 육체는 해칠 수 있어도 인간의 령혼은 정복할 수 없다."


1948년 그는 연변문공단에 편입되였고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선후하여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한어사범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시기 그는 적지 않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는데 그 대표작으로는 <고향산 기슭에서>이다.


고향산 기슭에서



고향산 기슭에 올라서니

사철 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아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초기인 1955년도에 동희철이 작곡한 이 노래는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도 애창되여오고 있는 연변의 대표적인 대중가요이다.


연변제2고급중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모아산으로 학생들과 들놀이를 갔다가 당시 학생회 문예부장이였던 김경석이 즉흥적으로 지은 가사에  단 곡-<고향산 기슭에서>연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정감을 보는 듯이 그려내고 긍지높이 노래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인차 대중들 속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널리 애창되였을 뿐만 아니라 1957년에 한어로 번역되여 출판됨과 동시에 1962년에는 자치주 창립 10돐 우수창작상을 받아안았으며 장춘영화촬영소의 영화 《리명》의 주제곡으로까지 선정되였다.


1956년에 동희철은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하여 음악편집, 음악부 주임을 담임했다. 이 기간 동희철은 《요청음악》, 《매주일가》등 프로를 개설하여 연변음악의 보급을 추진하는 한편 <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 <농민의 노래>, <아름다운 나의 고향>, <내 고향 금파도>, <복된 살림 이루었네> 등과 같은 우수한 가요를 창작했다.


그 후로 동희철은 민족음악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창작풍격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1958년 왕청현의 한 산골마을에서 생활체험을 하며 <내 고향 좋구 좋다>, 1962년 돈화시의 한 농촌마을에서 <손풍금 타는 총각>, 1965년 반석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벼꽃타령> 등 민족풍격이 짙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손풍금 타는 총각



<손풍금 타는 총각>의 창작과정에 대해 동희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노래는 1962년에 창작되였습니다. 마침 3년 재해가 끝난 다음 연변의 음악창작의 번영을 위해 문련에서 조직한 창작려행단에 저도 참가하게 되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손풍금이 4대나 되였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거기 있는 기간내에 열심히 기본공훈련과 손풍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마침 이 광경을 본 김창석 동지는 <손풍금 타는 총각> 이런 제목의 가사를 저한테 주었습니다."


가사가 맘에 든 동희철은 당장에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완성된 작품은 작사자와 작곡자 모두가 너무나 만족스러워했고 똑딱선을 타고 송화강 90리 배길을 달려 경박호로 가는 동안 내내 <손풍금 타는 총각>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똑딱선을 타고 경박호로 가면서 갓 창작한 

<손풍금 타는 총각>을 연주하는 동희철


문화대혁명 시기 동희철의 모든 작품이 반동독초로 되여 비판 받고 음악편집의 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했으며 10년 대동란 세월 속에서 가족들을 거느린 채 돈화시의 산간농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였다. 그러던 1972년 동희철은 연변인민방송국에 복직된다. 그러나 당시 음악프로의 70%가 본보기극으로 되여있는 불합리성을 비판하면서 중앙문화부 검사단과 자리를 같이한 좌담회에서도 "연변인민은 본보기극에 습관되기 어렵다. 그래도 조선족민요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또 다시 '3부정분자'로 강직당하고 처벌을 받았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그의 명예는 회복되였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 위원,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 연변텔레비죤예술단 명예단장, 동북군정대학교 사연구회 고문 등 사회직무를 맡으면서 꾸준히 음악창작에 정진하였다.


1978년 인민교원의 숭고한 노력의 성과를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적 형상에 담아 노래한 <선생님 들창가 지날때마다>(김철 작사)를 작곡한다. 이 노래는 1979년 한어로 번역되여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방송된 후 방송과 신문, 잡지를 통해 전국에 전파되였다. 1980년 중앙문화부 1954-1979(25년)소년아동문예작품 평의에서 작곡 2등상을 수상하였고 중국 20세기 소년아동 10대금곡에 당선되였으며 지금까지도 중앙인민방송국소년합창단 고정곡목으로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음악교과서 통일교재에도 편입되였다.


작사가, 시인 김철과 작곡가 동희철


그외에도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이 함께 모여 민주정치를 실현해가는 단결된 형상을 노래한 <형제자매 한자리에 모였네>(1983년 민족단결가요평선 작곡 1등상), 1989년에 발표한 <나는야 맹인가수>(1989년 제2차 복리상 가요콩클 작곡 1등상) 등 가요는 청취자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불후의 명곡으로 길이 애창되고 있다.


60여년의 음악생애에 동희철은 선후로 500여수의 가요를 창작했고 1978년에 첫 작품집 《고향산 기슭에서》를 출판한 뒤 《배움터의 멜로디》(2005년), 《사랑의 메아리》(2005년), 《인생반려》(2006년) 등 작품집을 출판하였고 가곡 10여수가 전국 음악교과서에 수록되고 레코드에 취입되였다.


안국민은 "동희철 선생의 음악작품들은 서정가곡의 선률이 류창하고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며 깊은 철리성, 사상성, 예술성이 보여지며 조선민족의 풍격이 뚜렷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동희철은 말한다.


"음악은 민족의 령혼이자 력사이며 문화이다."

"작자가 생활의 감수로 뜨거워지지 않고서야 어찌 남을 뜨겁게 감동시키는 작품을 쓸 수 있으랴!"

"명곡은 언제나 인민대중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갔을 때 창작이 가능하였다."


하여 세월이 흘러도 그가 창작한 불후의 명곡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고향산천에, 조국변강에 영원한 메아리로 울려퍼지고 있다.



래원 : 길림신문, 중국조선어방송넷, 《20세기 중국 조선족음악문화》- 종합



责编:郑慧

审稿:文实

编辑:崔莲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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